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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프로이트의 심리학

by yellowgreen24 2024.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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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정신이 의식, 무의식, 전의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 무의식이 의식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인간의 정신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빙산의 대부분이 수면 아래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마음의 대부분은 의식의 표면 아래에 있는 무의식 영역에 속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서 그 내용이 정확하게 파악되기 힘들고,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원하거나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무의식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거부하거나 억압하면 말실수나 정신 질환 등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식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력하거나 부적절한 생각, 기억, 충동은 억제되어 본능적 추동과 함께 무의식에 저장된다고 하였다.
그 과정을 '억압'이라 표현하고, 이는 정신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른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의식의 영역은 의식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조용히 조종하며,
무의식적 생각과 의식적 생각의 차이는 심리적 긴장을 낳는데 그 긴장을 풀려면 억압된 기억을 의식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의식의 영역
이 부분의 본문은 무의식, 전의식 및 의식 (심리철학)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개념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전에는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 후, 의식과 정신은 신성시했으나
육체는 부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치료 대상으로 보고 본능적인 욕구나 불건전한 면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대에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식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며,
무의식이라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당대의 철학에 반대되는 논리를 전개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이란 개념을 지동설, 진화론과 더불어 매우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옷을 입은 욕망의 덩어리라는 주장으로 인해 인간의 긍지에 상처를 입었다.
무의식과 꿈의 분석학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대중화한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회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갈등이 정서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그의 이론은 이후 자연스럽게 정신질환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그는 최면과 최면이 어떻게 신경증 치료에 도움을 주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후에 현재 '대화 치료'로서 발전하여 알려진 자유연상과 꿈의 해석에 대해서 이를 지지하며 최면술을 포기했다. 
이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특히 그 당시에 히스테리라고 불렸던 것에 관해 관심을 가졌고 이는 지금 전환신드롬이라고 불리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들과 환자에 대한 그의 치료는 19세기에 빈에서 논쟁이 되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는 그것들을 과학적 의학적 논문으로서 계속 논의되는 것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일반 문화에서 종종 논의되고 분석되어 왔다.
이드와 자아
이 부분의 본문은 이드 및 자아이다.
프로이트는 후기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마음의 통제구조인 이드, 자아(에고), 초자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드는 원시적인 충동들로 구성된 '본능'과 같은 모든 유전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정신의 무의식적인 부분으로 '쾌락 원칙'에 따라 어떤 욕구든 충족시키려 한다.
하지만 자아는 누구든 바라는 바를 모두 얻을 수는 없으며 주변 세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 원칙을 받아들인다.
이런 자아는 이드와 교섭하여,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 욕구를 충족하는 합리적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
그러나 에고는 부모나 사회의 도덕률이 내면화된 초자아의 통제를 받는데, 
초자아는 판단을 내리는 힘이자 양심, 죄책감, 수치심의 원천이 된다.
자유 연상
이 부분의 본문은 자유 연상이다.
자유 연상(심리 역동 이론)은 심리학에 사용되는 기술로서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되었다.
프로이트는 최면술이 틀리기 쉽고 의식이 있는 동안에 중대한 기억에 대하여
환자들이 회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최면술로 치료하기를 그만두었다.
자유연상 기법을 통해 프로이트는 명백하게 중요하지 않거나 잠재적으로 환자를 압박할 수 있는 혼란스러운 기억이 될지라도
그런 것과 관계없이 환자들에게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도록 했다.
이 기법은 모든 기억은 단일 연합의 네트워크에 정렬되어 있고 당장이든 후일에든 그것은 중대한 기억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불행하게도 프로이트는 기억해 내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통스럽고 중요한 기억이 환자에게 저항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결국 일정한 기억들이 철저하게 억압되어 있다가 정신의 의식 영역으로 뚫고 올라올 것이라는 견해를 갖게 된다
프로이트의 궁극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는 그것들을 정신 깊숙이 묻어버리는 내부적인 정신 갈등으로서의 이러한 기억의 회상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며,
자유 연상 기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신에 관한 연구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에 처음 들어선 것은 1885년 10월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공동 연구를 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 때이다.
당시 살페트리에르 병원장인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하였으며,
청중을 앞에 두고 히스테리 환자를 대상으로 최면 기법을 자주 시연했다.
그의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파리에 체류하면서 신경학 연구가 금전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신병리 치료로 진로를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1886년에 프로이트는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 자크 베르나 이수의 손녀 마르다 베르나 이수와 결혼하고,
자기 신경과 진료소를 차렸다. 프로이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했으나,
치료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환자와 본인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썼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대화의 목적은 환자가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무의식에 갇힌 강력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어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명명하며,
억압이 정신에 해를 끼치며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정신 신체증"(심신증)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대화 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40대가 된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했으며,
그 밖에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과 기억, 인격 발달의 변천을 탐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896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야코프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또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빈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을 출간한 이후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차를 융으로,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프로이트 또한, 융이 관심을 갖고 연구한 종교와 신비주의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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